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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5. 15世 〉18. <부정공>진사공휘송년유사(進士公諱松年遺事)
1. 문헌 목록 〉15. 15世 〉20. <절제공>덕봉공휘한중유사(德峯公諱漢重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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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부정공>통덕랑공휘필성유사(通德郎公諱弼成遺事)
通德郎公諱弼成遺事 公諱琯初諱弼成字仲珍相好亭察訪公後進士公諱璟曾孫月川進士公諱時述孫樂正公諱維馨有三男公其季也天姿英偉才氯魁傑文行夙就宗叔別提公諱晋老節愍公八世孫方寓于浴川竹谷里無育再三請嗣而不許及其疾革以禮曹版文示之公於是不得己而奔喪入系禮襄後奉主而還嘗慨然有言曰吾見爲人後而或有疏於生庭者此但知繼統之重而不知鞠育之恩可乎乃占樂正公幽宅于店方里補湯洞亥坐而封之夫人尹氏褂下兆域内自定一益曰吾死後繼厝于此則地下白骨庶可暝目矣性度公正廉平遏惡揚善好直捨枉遇物燭理明無不照接人恕情交無不洽由是得鄉人之心諸士子皆推重之爲鄉先生此非但扶鄉綱正風化凡正供外許多邑用無不勘過於是御衆寬裕隨事明辨自是人罕邪枉鄉無弊瘼知府協心吏胥推戴行之幾年威權歸己既而謝曰焉有士子而干帳簿者哉嗚呼文蹟之可據者己悉於灰燼中而但善德遺訓之溢於裔孫之心腹者與夫聞譽之播於鄉人之耳目者其大略如右云 통덕랑공휘필성유사(通德郎公諱弼成遺事) 공의 휘는 관(琯)이요, 초휘는 필성(弼成)이며 자는 중진(仲珍)인데 상호정찰방공후 진사공 경(璟)의 증손이요 월천진사공 시술(時述)의 손자이며 락정공(樂正公) 유형(維馨)의 三남 중 막내아들이었다. 공은 자질이 영위(英偉)하고 재주와 기운이 괴걸(魁傑)하였으며 학문과 행의가 일찍이 진취하였다. 절민공의 八세손인 공의 족숙 별제공(別提公) 진노(晋差)가 당시에 곡성 죽곡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공에게 후사되기를 간청하되 승낙하지 아니하니 그 병환이 위급할 때에 예조판문(禮曹版文)으로써 보이니 공이 이에 할 수 없이 입양하여 분상하고 예로써 안장한 후에 신주를 받들고 돌아와서 일찍이 슬퍼하여 가로되 내가 보기에 양자로 나가서 혹 생가를 멀리한 자가 있는데 이는 다만 계통의 중한 것만 알고 생육의 은혜를 모르는 일이니 옳을 것인가 이에 락정공 유택(幽宅)을 店方里 補湯洞 亥坐에 정하고 부인 윤 씨(尹氏)는 그 아래 장사하였다. 그 묘역 안에다 또 다른 자리를 하나 정하여 놓고 말하기를 「나 죽은 뒤에 이 자리에 계장하라, 그러면 지하에 계신 부모님의 백골이 아마 눈을 감으시리라.」 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공정하고 청렴하며 악은 막고 선을 나타내며 곧은 것을 좋아하고 굽은 것은 버리며 외물을 접하여 사리를 판별할 때는 정확한 판단력으로 해결하지 아니함이 없고, 사람을 대할 때도 모두 정분이 흡족하게 하여 고을사람의 마음을 한 몸에 모으니 모든 선비가 다 고을 선생이라 추앙하였다. 이는 다만 고을의 기강을 바로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속의 풍화를 바로잡고 무릇 정공(正供) 외에 허다한 邑用을 수시로 자담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뭇사람을 너그럽고 여유 있게 거느리고 일을 따라 밝게 결처하니 이로부터 간사한 사람이 드물고 고을에 폐막(弊瘼)이 없으니 지부(知府)가 마음으로 협종하고 아전들이 추대하여 시행한 후 몇 해에 위권(威權)이 자기에게 돌아온지라 이윽고 사절하여 가로되 어찌 선비로써 장부(帳簿)를 관계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아, 증거 될 만한 문헌의 자료는 이미 화재로 소실되어 버리고 다만 훌륭한 덕망으로 남겨준 훈계가 후손의 가슴에 맺힌 것과 영문(令聞)과 명예가 고을사람의 이목에 전파(傳播)된 것만 그 대략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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